초록

소설의 주된 시간적 배경은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이다. 때아닌 황사가 두 달 남짓 지속되면서 서울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은 그해, 마치 고대 중국의 왕국 누란을 삼켜버린 모래바람처럼 전국이 월드컵 열기로 뒤덮였고, 그 이면에 가려진 무비판적 대중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작가 현기영은 『누란』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87년 6월항쟁을 이끄는 전위에 섰던 주인공 허무성은 오랜 수배생활 끝에 검거되어 남산 지하고문실에서 김일강 등의 손에 모진 고문을 당한다. 겁똥을 쌀 지경에 이른 허무성은 끝내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과 운동조직에 대해 자백을 하고, 장학금으로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김일강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여 일본에서 유학생을 한다. 역사를 전공한 허무성은 귀국 후 김일강의 사촌형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고 김일강은 국회의원이 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계를 지속하며 김일강의 정신적 노예가 된 허무성은 자신의 무기력한 현실과 잊히지 않는 고문의 기억으로 인한 공포, 과거의 배신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정신적·육체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러던 중 허무성이 겪은 고문과 자백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해 떠났던 옛 연인 문정선과 재회한다. 방송국 피디인 문정선은 갓난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으면서 전남편과 이혼한 채 역시 상처받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허무성은 문정선에게 함께 살기를 제안하고 동거를 시작하지만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문정선과 애정 없는 결혼생활로 두 사람은 서로 위안이 되지 못한 채 무감한 관계를 지속할 뿐이다. 결국 직장과 가정 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문정선은 인도로 떠난다. 김일강을 만난 허무성은 박정희 정신의 부활과 현대판 파시즘을 꿈꾸는 김일강과 한판 논쟁을 벌이며 그동안 족쇄처럼 묶여 있던 그와의 관계를 끊는 계기를 마련하고, 한때 운동권 동지였다가 자신의 배신으로 검거된 적이 있는 친구 강한일을 만나 지난 시절에 대한 죄의식을 다소간 털어버린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막하여 전국이 온통 응원 열기로 뜨거워진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같은 학교 교수이자 김일강과 사돈지간인 여자친구 송난주의 유혹을 뿌리친 허무성은 그라피티 작업으로 자유와 반항 정신을 표현하는 학생 오용미와 가까이 어울리다가 본의 아니게 학생 성추행 사건에 휘말려 교수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다. 진실된 감정을 고백하는 오용미와 교수직을 모두 버리기로 결심한 허무성은 스스로 노숙생활을 택한다. - 출판사 리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