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1988년 가을, 중국 서북부의 가난한 마을 둥린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량 하오위엔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명문 친한(秦漢) 대학 중국 문학과에 합격한다. 하오위엔의 아버지는 원래 베이징 출신으로, 베이징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중, “자본가나 지주를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변증법에 어긋난다.”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우파로 몰려 1957년 황투고원의 척박한 시골로 추방당한 인물.
입신양명을 꿈꾸는 하오위엔은 아버지와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대학에 입학한다.
꿈같은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대학가에는 관료의 부정부패 타도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하오위엔은 ‘국가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명감으로 이에 적극 가담한다. 베이징으로 가서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기도 한 학생들의 애국투쟁은 결국 천안문 사태로 좌절당하고, 낙담해 있던 하오위엔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학교 근처 주점에 갔다가 학생운동을 젊은이들의 혈기에서 비롯된 철없는 행동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과 난투극을 벌이는 바람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처럼 엘리트 대학생에서 하루벌이 노동자로 전락한 하오위엔은 절망 속에서도 성실하게 생활하다가 일본인 잔류 고아 2세인 우매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도쿄에서 인쇄공 생활을 시작한 하오위엔은 재일 중국 민주 동지회에 가입해 ‘홍콩 반환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는 등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나가지만 점차 그의 꿈과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은 줄어가고 중국 민주화 운동도 점차 풍화되어 간다.
어느 날, 민주 동지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지가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여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중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 하오위엔은 결국 오열을 터뜨리고,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자식을 배불리 먹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며 “아버지도 젊었을 때는 많이 울었다. 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늑대가 울부짖듯이 울고서 후련해지면, 다음 날 아침 해가 정말 아름답게 보였어.”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내일 일어나거든, 아침 해를 보거라. 무지개가 보일지도 모르지.”라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정말로 아버지 말대로 일찍 일어나 딸 사쿠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 하오위엔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1989년 초여름, 천안문 광장 시위에서 돌아오는 길 열차 안에서 보았던 태양을 떠올리고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 출처 : Yes24